. 생활의 똥

지금은 장가도 들고 해서 만나기 힘들지만, 10년쯤 전엔 아주 가까이 지냈던 형이 있다. 홍대서 죽돌이짓을 하며 학교에도 자주 놀러갔었고(그 형이 홍대를 다녔다) 술도 곧잘 함께 마시곤 했었다. 98년에 탈북한 그 형은 3년간 흑룡강성 어딘가에 거점을 두고 기회를 엿보다 2001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가끔 술기운이 돌면 "내가 딱 하나 살면서 후회하는 거이, 북에서 태어났다는 거야"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당시만 해도 국가주의에 반공주의를 조금은 신뢰하던 터라, 나는 그 이야기를 "북한 같은 게 무슨 나라냐"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형앞에서 "북한이 사라져야 한다"는 둥 반공주의적 발언을 대놓고 한 일은 없었지만, 때로 내가 북한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는 어조로 말할 때 형의 기분이 어땠을까 하고, 가끔 생각해 본다.

2004년 아시안게임이 있을 때였지 싶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인쇄한 현수막이 비에 젖자 북한 응원단은 "장군님이 비를 맞으셨다"며 울기까지 했다. 참 지랄들 풍성하다며 흉을 본 기억이 있다. 김 위원장이 얼마나 그들에게 훌륭한 지도자였는지, 아니면 단지 세련된 폭압으로 국민들을 세뇌시킨 자였는지 그런 것은 모르겠다. 어쩌면 외부적 시선으로 보아선 후자 쪽이 우세하고 내부적 시선에선 또 전자 쪽이 설득력을 얻는 그런 형국인지도 모르겠다. 그 형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응원단의 그런 행동은 참 기이하면서도 한편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98년 로동 미사일 시험발사 당시 사리원사범대학(그 형이 북한에서 다니던 대학이었다)에서도 "인민들이 굶어죽는데 웬 미사일이냐"며 학생들이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이 농성은 김일성대학에서도 있었다고. 당국은 그런 학생들의 농성에 강경진압으로 대응하진 않았다고 한다. 형은 이런 이야기 끝에 "세상이 변하긴 변한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변하는지 먼저 변하는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학생들이 미사일 발사에 '인민 굶어죽는다'며 농성을 벌인 6년 뒤 응원단은 '장군님 비 맞으셨다'며 우는 이 모양새를 어떻게 봐야 할까. 서글프다는 건 이런 뜻에서 한 말이다. 국가라는 게 (그것이 얼마나 교묘한 방법을 취하건) 그런 분열증을 필연적으로 조장하고 방기하는 면이 있으니 더 그렇다. 어쩔 도리도 없고.

하여튼. 갈등하는 두개의 주체는 갈등이 격해질수록 내적으로 동일해진다는 인류학의 명제가 새삼 옳구나 하고 요즘 되뇔 때가 많다. 이 나라에도 북한에 버금가는 분열증이 있잖은가? 어떤 의도로도 동서고금에서 절대 면죄될 수 없는 폭압을 행사했던 전임 대통령들을 추켜세우는 자들, 아무 생각없고 그저 청와대 대리석 바닥만 제것이면 기분 좋은 현직 대통령, 그 주위에 꼬여 붙어 국민을 분열시키고 눈을 가려 제 이득을 취하는 고위직 인사들이나 국회의원들, 그런 모습에 분개하면서도 정부의 모략에 속아넘어가는 무력한 개인들. 어쩌면 거시이념이 또렷하고 더 직접적으로 개인에게 다가가는 북한보다 이 나라가 더 심한 분열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북한처럼 강제송환되거나 하더라도 그것이 음모론이 되어버리는 그런 상황이니까. 세상살이가 심해어 등껍질마냥 투명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사회의 불투명성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싶다. 이러니 분열증을 앓을 수밖에. 사회도, 사람도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사필귀정이네 인과응보네 하는 일들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일단은 나부터도 멀쩡하잖여.

잠이나 자야겠다.

로이 바스카, 이기홍 역, <비판적 실재론과 해방의 사회과학>, 2007, 후마니타스 Books

제가 통섭 내지는 융합이란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지는 1년 남짓인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10개월 정도인데요, 데이빗 윌슨이 <통섭>이란 책을 쓴 이후로 컨버전스 같은 그 어슷비슷한 단어들이 유행을 타고 있죠. 그 책이 아마 1999년에 나왔을 겁니다. 어쨌든, 제가 그런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 계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 과학이론이나 수학식, 과학기술은 예술이나 형이상학적 논변들하고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처음에는 과학을 바탕으로 모든 학문이 이합집산을 한다는 것에 대한 찜찜함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건 아무리 봐도 통섭이 아니라 동원이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통섭이란 건, 각 분야가 자기 고유의 특질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서로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당히 모호하고 낭만적인 어구로 들으실지 모르지만, 그때 저에게는 그랬어요. 그러다가 이전에 융합에 대한 노트를 작성하면서 썼듯, “각 분야의 내적 구조에서의 유사성과 차이점 탐구”에로 생각이 옮겨갔죠. 이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일단 발전으로 보고는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만난 것이 이 책인데요. 기본적으로 이건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에서의 철학적 탐색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소개하고 비판을 가미한 앤드류 콜리어의 <비판적 실재론>(같은 출판사)에서는 이것을 과학철학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책 표지에서 말입니다. 어차피 사회학을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며 과학의 영역으로 가져가고 있으니(거의 미국이 이런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과학철학이라고 해도 문제될 건 없을 듯합니다.

 

굉장히 난해합니다만, 로이 바스카의 문제의식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논리라고 부르는 어떤 사상적 이론적 결은, 그 안에 그러한 결을 양산해내는 구조가 숨어있다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구조는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논변의 결과로서 나오는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들은 논리적 틀거리 내에 갇혀있기에 그것이 서로 충돌할 경우 화해 가능성이 적으나, 만일 그 틀거리를 형성하는 보다 깊은 구조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화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이것이 “특정 층위에서의 논의가 교착상태에 머무르면 그보다 상위개념을 가져올 필요가 있다”는 슈마허의 말과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합리성과 논리적 체계에 대한 신뢰는 일종의 분열증을 낳는다고 저는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나마 조금씩 더 깊어지면서, 이 합리와 논리에 대한 거의 맹목에 가까운 신뢰를 어떻게 깨뜨릴 것인지를 고민해왔습니다. 그것은 모든 이분법적 논지뿐만 아니라 논리에 의한 충돌들을 해소하는 방안을 향한 고민이었습니다. 세상은 논리 같은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잖아요. 사실상 논리적 나눔이란 문제해결을 위한 편의상의 분할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눈 뒤에 다시 합치는 데 애를 먹는 사례를 너무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눈 이들의 어리석음이기보다는 논리와 말글이란 것의 본원적인 특징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논리적 나눔에 의한 갈등을 해소하고 다시 합치는 데 실재론은 강력한 힘을 보탤 수 있으리라 보입니다. 책 제목에서 말하는 ‘해방의 사회과학’에서 ‘해방’이란 이런 뜻으로 쓰인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한번밖에 읽어보질 않았기에 저도 여기에 대해 세세히 뭐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복해서 꼼꼼히 살피며 함께 공부하는 분들과 이야기도 나눠보고 해야 모두 소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또 이 짧은 글에서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내용은 아니고요. 아무튼 저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이라면 진득하게 들고 파보실 가치가 충분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절판되었지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 


아, 합정동에 있는 후마니타스 책다방에 가시면 아직 몇 권 있을 거라는 제보가 있습니다. 맴이 동하신다면 가보시길.:)


. 글싸기

요즘은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말만 쏟아내는 것 같다. 비판이 잦아지면 자칫 내가 병드는데.... 요것만 싸고 당분간은 좀 쉬면서 조용히 공부나 해야겠다. 가끔 생활의 똥이나 싸고.

앞으로 나아감 즉, 진보라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행동과 의견의 양태로 보자면 이거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으로는 안 어렵냐???? 라고 하문하옵시면 "똥줄 빠지게 어렵나이다"라고 대답하련다. 그런데 정치 활동에서 어려워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나는 행동과 의견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미시적인 철학적 성찰이 좀 부족했던 탓은 아닌가 싶다. 서구의 지적 전통을 계승하든 성리학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든, 사회의 진보를 위한 공동체 윤리와 개별적 자율성 사이를 오가며 내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 국내 연구를 본일이 별로 없다. 혹시 이러한 흔적을 아시는 분들은 알려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진보적 생각의 싹이 트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세상을 움직이는 윤리란 딱 1년만 지나도 구습이 되어 개인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공동체 윤리를 비판적으로 돌아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건은 한 사회에 자리한 공동체적 윤리는 그것이 사회에 뿌리내릴 정도의 세밀함과 보편적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비판적 성찰은 정수리에 계란 까놓으면 익을 정도로 골머리를 앓아야만 하는 일이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골머리 썩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진 않은 것 같다. 이건 물론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네에서 만나는 미국놈(여긴 애당초 희망을 걸 수 없지만), 독일놈, 이딸랴놈, 영국놈 등을 보면 공부깨나 한 종자들인데도 그런 생각이 별로 없다. 그런데 걔네들하고 우리의 차이점이라면 보수적 가치의 그릇된 부분들에 대한 지속적인 전복과 수정 보완의 지적 움직임이 얼마나 활발했느냐 하는 부분에서일 것으로 생각된다.

아주 잠깐의 시간만 지나도 공동체 윤리가 구습이 되기에 끊임없이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는 당위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정언은, 진보는 윤리적으로 정태적 개념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 윤리조차 느리게나마 변화하는데 그걸 비판하는 진보가 정태적 개념을 상정해서야 말이 되겠는가. 물론 어떤 변치 않을 궁극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강림하게 되면 보수적 가치의 폭력은 견줄 바 못 되는 폭력적 강령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소위 '진보적' 인사들이 저지르는 패착이기도 하다.

단언컨대, 진보는 태생이 분열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개별적 차원에서의 고민이며, 현실에서의 사회운동 및 정치운동과 그것이 맞닿는 지점에서 자신의 개별적 맥락과 그것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어야 하는지도 똥줄 빠지게 고민하는 일이다.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어쩌면 이 결론은 이미 나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알짜 진보가 되려면 보수적 가치마저도 인정하고 들어갈 수 있는 말랑말랑한 정신이 불가결하다. 이미 결론이 난 문제라 해도 지속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하는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론은 확대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때까지 괴로운 건 어떡하냐고?

인생 날로 먹을 수 있나 어디. 견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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