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노명우 지음 / 사월의책
나의 점수 : ★★★★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변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한다. 부모를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서부터 초자아와 이드의 중간자로서 경험하는 사회화의 변증적
과정에 이르기까지,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립하는 일련의 과정은
일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유아기에 경험하는 초자아와
이드 사이의 혼란을 잠재우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정, 반, 합
중에서 합이라고 한다면, 합의 단계에 이르러 사람이 하는 일은
정과 반을 통해 얻어진 경험을 내면화하고 스스로의 안에서 조직
organizing하는 일이다. 이 내면...화의 과정이 수반되지 않은 채
오로지 정과 반 사이의 충돌만이 계속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결핍
내지는 과잉(물론 이 둘은 상대적 밀도이지만)이 발생하며, 이것은
성장 이후 특정 행동양태의 과잉으로 가시화된다.
이 책은 관계맺기의 과잉과 내면화 과정을 허락하지 않는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속도감을 맹목적으로 좇게끔 강요하는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에 경종을 울린다. 제목은 <홀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지만,
실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고독이다. 고독은 홀로 산다고 해서 얻어지거나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요한다고 해서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며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저자는 고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앞서 언급한 항구적인 사회화의 변증적 과정 속에서, 합의
단계에 이르러 내면화를 "온전히" 해내기 위해선 현기증이 나도록 얽힌
관계들 속에서 잠시 떨어져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고독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고독이, 내면화를 위한 관조적
여유가 주어질 수 있는가?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에겐 짊어져야 할 역할이 늘어난다. 역할 자체의 다변화
뿐만 아니라 역할 내에서의 수행해야 할 과제도 때로는 점증적으로 때로는
급격하게 늘어나기도 한다. 과도하게 부여된 역할에 내몰린 나머지 "합"의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내면화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의 언어를
빌리자면, 과잉된 역할밀도에 짓눌려 자기밀도는 설 자리가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질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일상적으로 빈번히
일어나며, 자기밀도의 흔적을 찾아 몸부림치며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왕왕 어긋나는 경우도 쉬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게임중독이 내게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보인다. 게임 속 자아는 현실 속에서의 자아가 아니다.
그들은 희미한 자기밀도의 대체물이며 현실에 묻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아의 가상적 재현이다. 게임속에서도 물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하고자 특정
게임을 선택할 수는 있다. 문제는 이것이 내면화를 위한 관조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임의 세계는 고독의 공간이 아닌 도피처라고 보는 편이
마땅하다. 게임이 주는 쾌락의 순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그것이 "자신과 마주하고자 하는 관조적 여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된
고독"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게임이 대안의 세계는 될 수 있어도 고독의 공간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독이라는 공간은 스스로 고립되어 정적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곳이다. 가상적 자아가 아닌 실체적 자아를 대면하고 질의와 응답, 관찰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곳이다. 관계에 매몰된 채로는 타자에게 투영된
자신을 보게 되기에, 자신이 자신과 대면할 공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고독은 관계에서 잠시 떨어져 자신과 마주하는 것, 그를 위해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고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저자는 이 점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고독은 고립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머무름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이것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병렬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어야
한다. 현대인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과 그에 수반되는 정체성,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서로를 조건지으며
고독과 관계맺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결국 "온전한 개인의 형성"을 향해 나아간다. 시쳇말로
"요즘 세상에 안 미친 사람이 어딨어? 다들 적당히 미쳐서 사는 거지.
그래야 살아지고."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적당히" 미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면 "완전히" 미친 것 같은 일들은 어째서 빈번히 일어나는가?
과도한 집단주의 속에서, 여유를 허락지 않는 역할밀도 속에서 개인은
자아를 찾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며 부유한다. 때로는 자신의 실존을
찾고자 주어진 역할 이외의 관계를 맺기도 한다. 운이 좋다면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자아를 찾는 데
명백히 기여하는 관계망이라면 반드시 그 관계망은 각 구성원들의
고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소위 "건강한 집단생활"을 거론할
때면 언제나 개성을 묵살하지 않는 공동규범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저자는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을 스스로 취함으로써
관계에 매몰된 현대인들이 "온전한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관계와
고독의 균형"을 맞추는 데 그는 관심이 있다. 책의 말미에서 그는 고독한
채로 남아있기보다 연대를 통해 "공동체적 개인"의 성립이 가능하도록
사회가 재편될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개인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작든 크든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개별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규범을 통해 인간으로서 지닌
"본질적 사회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초의 정체성이
관계를 통해 단초를 얻듯, 개인의 개별성은 고독 속에서만 보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에겐 없었던 개인숭배의 전통을 향해 나아가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H.Karr는, 르네상스로부터 이어져온 개인숭배의
전통은 개인이 곧 사회이며 사회가 곧 확장된 개인이라는 신념을 토대로
한다 밝힌 바 있다. 개인과 사회가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지속적으로
서로에게 간섭하며 서로를 조건짓는 것이 곧 개인숭배의 사상이라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바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사회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개인숭배 사상을 향한 도정이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것이
개별적 다양성 즉, 개성을 향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강박을 덧씌우는 불행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역할밀도에
짓눌려 자아의 귀가 닫혀버린 이들이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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