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철학을 해야 하는가?> 글싸기

지난해 철학수업을 위해 만들었던 수업노트 중 첫머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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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가 살아가며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철학은 왜 하는 것일까? 그 많은 철학사상은 어쩌다 나온 것일까? 그런 것들이 실생활에 얼마나 유용한가? 살아가는 데 도움은 되는 것일까? 그 많던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글을 어렵게 썼을까? 그것들이 지금 내가 사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일까? 대개는 이런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할 때까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한 켠에 밀어두고 이따금씩 꺼내보는 백과사전처럼 언뜻언뜻 떠올리다 말다 하기를 반복합니다.

위의 질문들은 철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편견과, 철학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시사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나는 철학에 대해 널리 알려진 편견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오해를 풀고, 철학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무엇이건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채로도 철학의 제법 깊은 부분에 관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지를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여러 번 이상 던지게 되는 위 질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철학에 대한 첫 번째 편견은, “철학은 현실과 관계없는 문제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아도 그렇고 깊이 들여다보아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화 에선 스칼렛 요한슨이 “철학을 전공했다”고 하자 빌 머레이가 농담 삼아 “오, 백만장자가 되는 공부를 하셨네요”라고 대꾸하기도 하죠. 결론부터 말하고 가자면, 철학은 현실과 관계없는 분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 현실과 관계없어 보이는 것은, 그것이 현실을 다루는 방식에 의해 생겨난 편견이겠습니다. 철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들에 그 모티프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거나 혹은 귀에 들리고 입 밖으로 나오는 현상적인 것들에서 철학이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현상적인 것들로부터 출발은 하지만, 철학이 이루어지는 곳은 (물리적으로 말하자면)현상의 이면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논의들은 어딘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고 쓸모없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상과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는 고민들은 대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사람과 일 사이의 관계, 나아가서는 사람과 조직, 조직과 사회 등으로 번져갑니다. 이런 생각의 번짐 현상은 조금 깊이 생각해보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경험하는 것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보편적 도덕, 윤리, 정의, 관계, 마음, 나아가서는 진실, 진리, 존재까지도 건드려보곤 합니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해답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를 정립해가며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하거나 눈감거나 조율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곤 합니다. 때로는 답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철학자들의 글이나 책을 읽기도 하죠. 그것을 참고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합니다. 네, 이것이 바로 철학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이란 현실적인 문제 하나하나에 대해 시시콜콜 훈수를 두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어떤 원리라든가 방식 등,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과 그 저변에 도사린 정신적인 근거를 탐구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간단하게나마 현실적 문제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 근거라든가 인간의 행동원리 따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을 밝혀보았습니다만, 여전히 철학은 어렵기만 합니다. 특히 철학자들의 책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번역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철학자들이 반쯤, 때로는 완전히 미쳐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일까요. 이것은 다음으로 이야기할, 철학에 대한 두 번째 편견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남긴 무수히 많은 저작은 그들의 생각이 문자언어로 표현된 것들입니다. 즉 그들이 생각한 결과를 내놓은 것이죠. 물론 그들의 출발점은 우리 모두와 같습니다.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간단하고 단편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제의식은 그런 간단하고 단편적인 질문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보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현실로부터 눈감은 결과가 아니라 외려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직시한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간단하고 단편적인 질문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이고,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 체계적인 질문을 추출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나는 철학을 가리켜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과 저변에 도사린 정신적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간단하고 단편적인 질문들"로부터 "보다 구체적이고,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 체계적인 질문을 추출"하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즉 철학적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한 질문을 정리하여 일정한 보편성을 지닌 문제의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저작은 바로 이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철학서가 아닌 수필집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철학의 한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이 “누구나 하게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엄연한 하나의 학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철학에는 일련의 체계가 필요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논리가 요구됩니다. 철학자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와 같은 논리와 체계를 만들어 문자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기록했던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저작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일상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을 보다 보편성 있는 문제로 다듬은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이에 더불어 다듬어진 문제를 다루고 전개하는 방식이 학문적 논리와 체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용어로 구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철학자의 저작을 접하건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일정 정도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 특정 철학자의 논리와 체계를 본받아 동일하거나 혹은 거기서 더 발전시킨 문제의식, 논리적 체계 따위를 전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하나의 “철학사상”이 형성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전의 철학사상으로부터 “아, 이것은 어딘지 불분명하거나 온당하지 않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비판적으로 그것을 성찰하고, 수정?보완하여 자신의 논리적 체계를 세우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혹은 비약적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철학사”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져 온 것입니다.

이제 철학에 관한 두 번째 편견을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내가 보는 철학에 대한 두 번째 편견은 곧, 철학사와 철학을 동일시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늘 철학과 연결될 수 있는 매개, 그러니까 일상적 문제들의 이면에 숨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면서도 “철학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사와 철학을 동일시하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철학사와 철학을 동일시하는 편견은 위에서 간접적으로 그 답을 기술해놓았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철학사는 철학이 아닙니다. 단지 철학의 결과를 시대 순으로, 각각의 사상 사이의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고려하여 정리한 것일 뿐이죠. 그래서 철학사는 “내가 철학을 하는 데 별 쓸모가 없는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겠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사는 사람의 일에 대해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그렇게 해서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성과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비근한 예를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만일, 어떤 정치인이 보수적인 성향을 늘 고수해오다가 뜬금없이 급진적인 정책을 발의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급진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오, 이자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어!”라고 말하며 쌍수를 들어 환호할까요, 아니면 “이자가 드디어 망령이 들었군!”라고 말하며 그를 비난할까요? 당연히 후자 쪽일 것입니다. 이는 그 정치인이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언행이, 막 내놓은 급진적인 정책과는 닿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의 맥락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쟤 왜 저러니” 하며 혀를 끌끌 차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맥락이 닿지 않는 행동을 하는 정치인은 결국 양쪽 모두에게서 쌍타를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한 사람의 맥이 닿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에 관한 것이야 여북하겠습니까? 한 명 한 명의 개인이 역사적 존재라는 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적어도 지금의 시대를 알기 위해 이전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철학을 알고자 한다면 이전 시대의 철학을 참조해야만 하며, 이런 점에서 철학사가 오늘 지금 이곳에서 “내가 철학을 하기 위해”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철학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는 없겠습니다. 흔한 말로 “골치 아픈” 것을 왜 해야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나 역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철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일상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에서 우리는 거의 언제나 그쳐버리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사람을 보고 더 많은 일들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생각의 정돈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일상적 문제제기는 일정한 깊이와 넓이를 지니게 됩니다. 즉 일정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례는 오로지 지적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탓에 감각적 행동이나 판단 이외의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은 경우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탐구하는 행위는 인간이라는 종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칸트는 “형이상학적 숙명”이라고도 말했습니다(<형이상학 서설> 서문 中). 나는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그와 같은 탐구적 본능이 있다는 점을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자 합니다.

이 탐구적 본능이 발현되는 형태는 사람이 살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각자의 맥락 속에서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모리스-메를로 퐁티를 참조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김재권을 참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성향이 결정되기 때문이죠. 얼마든지 그런 사례를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르다 하더라도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은, 비록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탐구적 본능”이라는 것이 기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약간 수정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철학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묻기보다, 우리는 왜 철학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물어야 더 좋은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윤리보다도 앞서는 생득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가봅시다. “왜 인간은 철학을 할 수밖에 없는가?” 이것이 제대로 된 질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는 여기에 대한 답이 마치 “인간은 그렇게 생겼으니까”라는 편리한 문구로 대처 가능해보입니다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더구나 그와 같은 대답은 철학적이지 않습니다. 철학은 그 지점에서 “그럼 왜 그렇게 생겼는지”를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하나의 질문이 나왔을 때 그에 대한 답이 명확하게 나온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인간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를 위해선 먼저 철학의 발생적 근거를 짧게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흔히 탈레스를 가리켜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최초의 철학적 질문을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선 탈레스만이 아니라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비슷한 시기의 사람들을 한데 묶어 말해보겠습니다.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무슨 메네스, 무슨 탈로스 참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초기에 던진 질문은 공통적으로 “세상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은 무엇인가?’였던 셈입니다. 물, 불, 흙, 공기, 숫자, 태양, 별의 별 것들이 다 등장합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한다는 것이죠.

이 호기심이 무엇에서부터 시작했을까요? 왜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알고자 했겠습니까? 해가 비치고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동물들이 뛰어다니다 서로 잡아먹고 먹히고,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고, 바다가 요동치는 이 현상들을 그들은 왜 궁금해 했을까요? 나는 이것을 두려움으로부터 찾고자 합니다. 당시로서는 절대로 그 원리를 알 수 없었던 자연의 신비한 현상들에 대한 두려움을 벗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학으로서의 철학을 바라보자면, 삶에 배태된 여러 신비적 요소들 중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을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피해갈 수도 없고 그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요소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겠습니다. 절대적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가고자 하는 열망, 이것이 바로 인간학으로서 철학의 모티프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은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집니다.

불멸에의 욕구는 주로 미학적으로 예술의 발생적 근거에 쓰이는 개념인데요, 서양철학의 초기시대 즉 인문주의가 성행하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시절 예술은 시와 철학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술은 당시 기술의 범주에 들어있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의 모티프는 철학의 모티프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의 구분과 차용은 어디까지나 학문적 분과를 나누는 데 필요한 논리적 구분일 뿐이겠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논리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에둘러서 혹은 뭉뚱그려서 기술하려 합니다. 철학이 인간학임에 분명하다는 것과 인간이 불가피하게 불완전하며 논리적 존재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논리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글은 관념적이거나 편협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이 철학과 이어지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앞서 철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질문은 곧 앎에의 욕망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철학에는 일정한 논리와 나름의 체계가 있는 바, 그러므로 철학적 의미에서 앎이란 특정한 논리와 체계를 통하여 질문-인간에 대한 질문의 답을 구하는 일임에 다름 아니겠습니다. 나름의 논리와 체계로써 답을 만드는 행위는 곧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질문을 넘어 다른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의문을 해결하고 극복(때로는 정복)해나가는 과정이겠습니다.

이제 인간이 철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 앞에서 인간은 그것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외면할 수 없는 두려움은 무지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에는 신비의 영역에 머물렀던 자연이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심 따위를 안겨주었듯, 삶의 제 요소에 대한 무지는 삶에 대한 두려움의 기저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인간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이 같은 두려움을 차츰 제거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서의 많은 신비가 벗겨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대상이 아직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대단히 오랜 시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으로,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정복되지 않는 한 죽음의 존재로 인해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삶에 대한 열망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도록 할 것입니다.

덧글

  • 零丁洋 2014/01/25 00:25 # 답글

    낯설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불편함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 西崙 2014/01/25 03:34 #

    네 그런 면면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번의 질문이 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불편함을 왜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유하는 걸까요? 또한 낯설고 이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많은 것들이 어느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날이 있지 않나요? 당연한 것들은 왜 그렇게 어느날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까요?
  • 零丁洋 2014/01/26 00:34 #

    서륜// 친근한 것이 넟설음으로 돌변하는 것은 우리 넘어에 존재하는 강력한 실제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 초라한 존재이지만 우리의 의식은 자신을 전부로 믿는 착각이 이런 친근함이 배신하는 이유라고 봅니다.
  • 西崙 2014/01/26 19:30 #

    함축적이고 날카로운 답변 감사합니다.

    말씀하셨던 "자신을 전부로 믿는 착각"에서, 근래 들어 진화심리학에서도 이것을 풀어낸 결과가 있었습니다. 결국 "나"에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은 개성, 자의식, 주관적 체험을 특수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구조적으로 형성된 진화의 일반현상이라는 게 그 이야기인데요. 이것이 얼마나 신뢰성 있는 검증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라는 견해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친근함의 배신에 한 몫 한다는 말씀에도 무척 공감이 됩니다. :)
  • 세진 2014/01/31 02:07 # 답글

    글 읽어보기 전에, 이제 곧 철학 수업 비스무리한 걸 듣게 될 사람으로서 첫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대답하자면요.

    철학을 처음 접한건 고등학교 윤리 수업 때였어요. 고등학교 때도 사람이라면 조금씩 생각은 하고 살잖아요? 생각이 구체적이고 가지런해지 못했지만, 문제의식이나 굵직굵직한 주제같은건 다 어린 나이에 한번씩 나오기 마련인데, 그때 했었던 생각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그럴듯하게, 누군가에 의해서 과거에 말해졌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친구들한테 이런 말 하면 욕먹는데, 누가 그렇게 말해줬고 그게 철학자였다는 사실의 든든함은 상상을 초월해요.

    사실은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었는데, 나는 이때까지 겉모습만보고 행동했다는 사실도 굉장히 놀라웠고요. 사물이나 현상을 뒤트는 용기가 굉장히 재밌고, 짜릿하더군요. 제 몸을 옥죄고 있던 현실의 권위, 나태함들을 적어도 생각으로나마 깨부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일이예요.

    또 하나를 더 꼽자면, 공감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후에 사회문화라는 사회탐구 과목에서 배웠던 대략적인 내용들, 졸업하고 나서 사회에서 던져지는 콘텐츠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들에서 철학, 쉽게 풀어쓰면 사람들의 생각이 누구누구 학자의 이름을 빌려서 튀어 나올 때, 참 별 재밌는 일도 다있네 싶었죠. 정말 잘 배웠다 생각했고요. 그게 조금 커지니까 사회학과에서 배우는 개념들이 되더군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의 생각 알기가 참 힘들잖아요. 점점 사람 관계가 단편적이어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능력조차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도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된 게 고작 몇개월도 안되고요. 내가 말하기 힘들 때 누군가의 말을 보면서 익혀나가는게 중요한데, 그런 사고방식의 흐름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걸 보면서 내가 배우고, 내 이야기를 내 입으로 직접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이건 철학이라는 구체적인 학문 말고 다른 분야도 총체적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말하고 보니 헷갈리네요.

    어쨋든 제가 나서서 이런 글을 적을 정도면 철학이 제 인식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건 분명하겠네요. 추가로 이런 물꼬를 트도록 만들어주신 분이 제 중학교때 윤리 선생님이셨죠. 저한테 특별히 전수한 것도 없었고, 저는 그냥 말 없이 이야기만 듣는 사람이였는데, 나중에 그게 큰 도움이 되더군요. 막 옛날에 심어놓고 까먹었던 씨앗이 자라난 것처럼 약 3,4년 후에 이렇게 큰 빛을 보게 만들어주셨으니까요. 저는 참 무심한 학생이라서 마음 속으로만 이렇게 고마워하고 있다는게 흠이네요.
  • 세진 2014/01/31 02:15 #

    제가 겪어본 바로, 사람들은 철학을 하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거예요. 철학을 비롯한 인문이 미래에 지향해야 할 방향은 바로 대학에서 뻗어 나와 현실 속에 안착하는 겁니다.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네요. 인문학의 대중화!!!! 정말 시급하고 중요해요. 적어도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는 학생 때가 가장 최적의 시기겠죠.. 미래의 교육과정이 개인의 삶의 질을 초점으로 만들어졌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西崙 2014/02/02 08:33 #

    진솔한 댓글 감사합니다. 인문학의 대중화라는 부분에서 크게 공감은 됩니다만, 사실상 인문학이 소비재로 치환되는 요즘 모양새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행여 "내가 보수적인 것은 아닌가" "진지함에 매몰되어 인문학에 재기발랄함이 끼어들어선 안된다는 엄숙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인문적 소양의 기본은 스스로 질문하는 것과, 그것을 탐구하려는 마음가짐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엄숙주의는 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보니,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이란 책이 새로 나왔더라고요.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책을 썼다고는 하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둔다면 좋겠지요. 다만 저는 책보다는 스스로 책을 찾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고방식의 흐름을 엿보고, 배우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하는 것"은 뭐.. 여러가지가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아주 클 테고요. 논리학이나 사회학, 수사학과 같은 것들도 있겠지만 어느 하나를 하면 다른 것도 할 수밖에 없는 분야인지라 뭐다~! 라고 딱 짚어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네요.:) 그래도 철학을 하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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