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서의 평등에 관한 좁고 짧은 생각 글싸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써진 글을 봤습니다. 내용인즉슨 이래요 : 반핵 내지는 탈핵을 외치는 구호에서 "아이들을 위한"이란 말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요, 따라서 "아이들"은 반핵이나 탈핵운동의 주체에서 제외된다는 논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현대사회의 주체이며, 따라서 "아이들을 위한"이란 구호는 "아이들"을 주체로 존중하는 데 부적절한 구호다. 앞으로는 "우리 모두를 위한"으로 바꾸는 편이 좋겠다.

 

결론부터 말하고 가겠습니다. 애취급 당하기 딱 좋은 글입니다. "아이들을 위한"이란 말이 내가 보기엔 "다음 세대를 위한"으로 해석되는 게 온당합니다. "For our children"이란 말을 "Children must be out of discourses"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이것 하나밖에 못 찾겠습니다 : 나 다 컸거등요? (떽기, 이놈들아.)

 

"아이들을 위한"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으로 바꾸자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반핵이나 탈핵은 지금 당장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수백 기가 넘는 원전을 지금 당장 폐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와 그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장 그것을 모조리 폐쇄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원전을 가동시킴으로써 거기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모조리 폐쇄시키면서도 그들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아시다시피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겠습니다. 그것만큼은 훼손될 수 없는 대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한 일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되어야 한다는 그 당위 때문에 반핵/탈핵을 외치는 구호는 필연적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다음 세대란 지금 자라나고 있는 세대일 수도 있고, 또는 그들의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아직 흰머리 나기엔 이른 우리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으로 바꾸는 데 내가 동의하는 것은 이런 취지에서입니다.

 

반면에, "아이들을 위한"이 단지 "애덜은 주는대로 받아먹어라, 떠들지 말고"라는 취지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담론에 참여하기 위해 구호를 바꿔야 한다는 태도에는 맴매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이 평등이라는 이름의 환상이 불러오는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단서로 해서 나는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교육에서의 평등, 말입니다. 아주 원론적인 부분에서요.

 

얼마 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개악하는 데 대한 토론회가 열렸었죠. 거기서 나온 한 발언자의 발언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 사실 교사라는 직업은 우리의 윗사람이 아니죠. 교사는 학생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을 뿐이고, 학교라는 공간은 교사가 가진 더 많은 지식을 학생이 나누어 갖는 공간입니다. 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위아래가 있어야 하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위의 발언은 다소 격앙된 상태에서 나온 내용이며 (그래서인지 몰라도)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만, 이와 어슷비슷한 생각을 나는 참 많이도 보고 듣고 읽어왔습니다. 정말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위계가 없는 걸까요?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내가 굳이 교육에서의 평등을 짚어보려는 의도를 먼저 언급해야겠습니다.

 

나는 일단, 평등이란 단어가 완전한 수평적 관계를 지칭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관념적으로 그것은 수평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것도 그 수평적 관계를 훼손할 수 없는 것은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이 나는 "생명"이라고 봅니다. 삶과 죽음 말입니다. 그것만은 어떤 것도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 평등에 놓여있습니다. 나머지는 본질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불평등의 요소를 늘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불평등은 우리가 물론 해소해야 하고 지양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와 달리, 인간의 활동 중에는 필연적인 불평등을 내포한 것들이 있습니다. 대개 그런 필연적인 불평등은 활동을 위한 관계의 설정에서부터 시작되곤 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면서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란 분야가 아닌가 합니다. 내가 특히 교육에서의 평등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그럼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를 온당치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들에게요.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이런저런 교육철학의 개념을 갖다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교육이란 활동은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지켜보는 일이건 조언하는 일이건, 이끄는 일이건, 강제하여 훈육하는 일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성장을 돕는다"는 데 이견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성장하는 이가 학생이고 성장을 돕는 이가 교사임은 불문가지입니다. 학생은 자식일 수도 있고 후배일 수도 있고 후임병일 수도 있고, 또는 사내에서의 후임자일 수도, 많은 경우엔 정말 문자 그대로 학생일 수도 있습니다. 이 관계가 정말 평등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가 정말로 완전히 평등하다면, "교사"와 "학생"이란 어휘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까? 완전히 평등한 관계란 건, 내가 보기엔 호혜적 관계 중에서도 서로에게 베푸는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그렇다고 볼 수 있는지 나는 의문입니다.

 

설마 "나는 학생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아요,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 많아요"라고 항변하는 어리석은 분은 계시지 않겠죠. 내가 지금 유자차 끓여놓고 마주앉아 봄나물 살 만한 곳 찾듯 수다 떨고 있습니까?

 

물론, 가르치는 일은 곧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르침과 동시에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지식과 사유과 정돈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고, 이미 교육심리학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증명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자신의 지식과 어지러운 사유의 편린을,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정돈한다 해서 교사가 곧 학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사의 미덕 혹은 교육행위에 수반되는 부수적 효과 중 하나일 뿐, 교육행위의 당위라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다릅니다. 교사가 교육행위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재확인하거나 정돈하고, 사유를 가지런히 하게 된다면 학생은, 교육행위를 통해 모르던 지식을 얻고, 새로운 사유를 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때로 교사도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학생들로부터 얻습니다만, 그것이 학생의 경우만큼 잦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소 도식적인 이야기가 되긴 하겠습니다만, 이런 면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호혜적 관계에서 서로에게 베푸는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는 그 관계의 성립 자체로 위계질서와 불평등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질서를 완전히 부정하고자 한다면, 논리적으로는 교육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서로에게 배우는 벗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교육적 의도 없이 단지 자신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얼마나 배우는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이것은 교육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명백한 교육의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확히 교육의도가 개입되어 설정된 관계-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어떤 위계도 없이 자유로워야만 한다면, 그것은 곧 교사에게 교사가 되지 말라, 학생에게 학생이 되지 말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부당한 위계질서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물리적/상징적 폭력 따위는 마땅히 지양되어야 할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 자체를 뿌리부터 부정하기 시작한다면, 그로 인한 폐단은 부당한 위계질서에 의한 폐단 못지않거나 어쩌면 더욱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당한 위계질서에 의한 폐단은 교육행위 자체를 부정하진 않은 반면, 위계질서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오는 폐단은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에 뿌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만 간단히 짚어봤는데요. 나는 이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진보"로 분류될 수 있는 여러 활동이, 기존 질서에 대한 단순한 반등으로만 치부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원론적인 부분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겁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들어가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호 외치느라 쉬어터진 목소리 달래자고 계란 값만 까먹은 꼴이 테니까요.


덧글

  • 가녀린 얼음요새 2014/03/21 22:49 # 답글

    "좁고 짧은 생각"이라는 제목은 잘 지으셨네요.

    1. "아이들을 위한"을 '아이들을 담론의 장에서 배제하겠다"로 해석할 이유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그것을 "미래세대를 위한"으로 해석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2. "아이들을 위한"이란 구호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 모두를 위한"이 낫다면, 그냥 후자로 바꾸면 될 일입니다. 그걸 가지고 "떼끼, 이놈들아", "맴매라도 해주고" 운운하는 게 바로 '없애야 할 병폐' '부당한 사회적 권위'입니다. 무엇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위와 권한을 부여해 주었습니까? 나이입니까, 사회적 지위입니까? 당신은 인격적으로 동등한 사람과 대화할 때도, "맴매를 해주겠다"는 얘기를 합니까?

    3. 당신같이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가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무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을 반증해 주는 것 같군요.
  • 가녀린 얼음요새 2014/03/23 04:36 # 답글

    떽끼 이놈, 설명을 해 줘도 못알아 먹네. 궁둥짝에 맴매라도 해주고 싶네.
  • 西崙 2014/03/23 04:52 #

    에이 거 참... 봐주세요.ㅋㅋ 저도 괜히 그냥 비꼬아 말했다가, 삭제하고 다시 씁니다.

    조심하겠습니다.ㅎㅎ 사실 좀 애처럼 구는걸로 보여서 쓰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정말로요. 지적 감사하고요.

    그런데 1번은 좀 동의가 어렵네요. 적어도 논증이라도 있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구호와 담론의 장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 사이의 어떤 상관관계든, 인과관계든, 혹은 그 사례라도요.

    그 글에서 말하는 건 단지 어떤 수사적인 문제로 보이거든요. 저한테는.

    이 글에서 빠진 내용이 있는데요, 곧 송고할 글에는 모두 포함시켰습니다. 그게 뭐냐면,
  • 西崙 2014/03/23 04:51 #

    "우리 아이들을 위한"이란 구호를 정작 아이들은 외치지 못한다는 건데요. 제가 보기에 이건 구조적 억압이라기보다 수사적 문제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구조적 억압으로까지 이야기를 개진시켜 버리려면, "구호에 의한 구조적 억압"이라는 논증시도가 있어야 했단 말이죠. 그런데 아수나로에서 나온 글에는 그런 게 전연 없어요. 그저 거칠게 엮어두기만 했을 뿐.

    뭐 암튼.... 비꽈 말해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도 종종 걸음하셔서 이렇게 지적해주세요. 좋은밤 되십셔. 이미 새벽이지만..ㅎ
  • 가녀린 얼음요새 2014/03/23 05:14 # 답글

    西崙 /

    말씀하신 '수사적 문제'와 '구조적 억압'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위한"이란 표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장애우'나 '어르신'이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용어/표현 자체가 타자화되어 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그 용어/표어를 정작 본인들은 사용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장애인이야'는 가능한 표현이지만 '나는 장애우야'는 가능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아이들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아이들을 운동의 주체에서 배제한다는 주장도 바로 같은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이고요. 용어사용 하나에 많은 보이지 않는 전제와 습관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윗 댓글은 님이 쓰신 표현이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무시인지 모르시는 것 같아서 그대로 되돌려 드려 본 것인데, 기분 나쁘셨을테니 사과드리겠습니다.

  • 西崙 2014/03/23 05:34 #

    아뇨, 전혀 언짢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단쳐주시니 좀 민망하기도 하고 제가 웃기기도 하고 그렇더군요.ㅋㅋ (정말 그런 것 없으니 계관치 말아주십셔.:) )

    그런데 여전히 저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용어와 표현 자체가 타자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의합니다. 또, 용어사용 하나에 많은 보이지 않은 전제와 습관이 담긴다는 말씀에도 적극적으로 동의하고요.그런데 수사적인 문제가 구조적 억압으로까지 이어진다는 말씀이 성립하려면, 사유가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촘스키에 의해 깨진 지 오래죠. 물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를 논증 없이 연결지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구조적 억압"이 "수사적 문제"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수사적 문제"가 "구조적 억압"을 불러온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같은 맥락"이라는 가정 하에, "수사적 문제"와 "구조적 억압"의 인과성 내지는 상관성에 대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제가 문제를 제기하는 건 그 시도조차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해석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해도, 해석 역시 논증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질 않습니까.
  • 가녀린 얼음요새 2014/03/23 05:45 #

    해석과 논증의 문제까지 끌고 들어갈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즉, 수사적 억압이 구조적 억압을 불러온다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구조적 억압이 수사적 문제로 드러난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사적 문제는 존재하는 구조적 억압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나 징표로 보는 게 적절하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언급하게 되서 죄송하지만, 님께서 '떽끼 이놈들' '맴매를 해주고'라는 표현을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라 하여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셨던 것과 유사한 암묵적 무시와 억압이 수사적 표현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그러한 수사적 표현을 문제삼는 것은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못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 西崙 2014/03/23 06:20 #

    네, 제가 그런 표현을 쓴 건 제 편견이나 '내가 으른이여!'하는 생각의 기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이란 구호가 과연 배제한다는 것까지 포함하는 기표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좀 찜찜합니다. 무엇보다도, 글의 내용은 "저 구호가 그런 억압을 불러온다"는 것과, "그런 억압이 저런 구호를 낳았다"를 거칠게 버무려놓았거든요. 읽어보신 것 같은데, 이점은 눈치채고 계시겠죠.

    아주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죠. 아주 은밀한 형태로 그 구호 속에 그런 생각들이 녹아있을 수 있다고도 봅니다. 다만 어떤 정도의 차이랄까요. 후대를 위한다는 생각이 가장 주된 가운데, 거기에 그런, 아이들을 주체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한쪽에 불편하게 달려있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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